하나님은 3등입니다!

현대의 사회가 대부분 그렇듯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자극적인 뭔가로 관심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온라인 환경에서는 화려한 옷이나 좋은 차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남의 이목을 끌 수 있으니 더욱더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진다. 

SNS를 스크롤 하다가 보면 뭔가 강렬한 것만이 손가락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러는 와중에 발견한 것이 이 문구이다. “하나님은 3등입니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단 스크롤을 멈추는 것에는 성공적이었던 이 자극적인 문구를 터치했을 때 낚시 당한 것에 불쾌해 하면서 재빨리 빠져나오게 될지 뭔가 통찰력을 얻게 될지....후자 같은 경우가 가끔은 있기 때문에 SNS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보다 더 추구하는 두 가지 때문에 3등으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었다.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진실이었고 더군다나 그 글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이 집약되어 있었고 잘 정제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흐르는 이 눈물은 뭐란 말인가.

우리에게 있어 1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그것에는 우리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평생 그러했음에도 스스로 놀랄 만큼 빨리 반응하며 합리적 타협점을 찾는데 능하며 당위성에 대해서는 AlphaGo만큼 논리적이다. 

누군가 원하는 것을 방해하려 든다면 우리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그 적개심의 제물이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방해자가 하나님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자주 살짝 입꼬리를 들어 웃음으로서 상대방의 존재를 가볍게 자신의 무릎 아래에 두기도 하고 때로는 돌아보지 않고 무심하게 걸음으로서 누군가를 경멸하고 있음을 흘리기도 한다. 

쇼핑하는 것, 게임하는 것, 좋아하는 음악과 여행을 참고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있다고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자신을 다 드렸다고 자부하고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정도는 기본으로 여기며 자신의 인격을 세세하게 분석하며 용납하지 않고 주님 앞에 날마다 나아가 십자가 밑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역자라면 그다음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칭찬 일색일지도 모르는 그런 사역자에게도 주님은 2등에 오르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영적 기쁨은 사실 자신의 인간적인 의가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사역자는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단언하자면 사실이 그렇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럴 것이다. 

‘메시아대망사상’을 가지고 주님이 오시기만을 고대하면서 목숨 따위는 언제든 드릴 수 있을 것처럼 살았던 AD 30년경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은둔 종교인들과 열성 당원들은 하나 같이 그렇게 갈망하고 갈망해 왔던 메시아를 어찌할 수 없는 분노로 돌로 쳐 죽이려 하다가 결국 더욱 잔인한 방법을 찾아낸다.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으로 그들의 분노를 토해버리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종교적 열심과 그에 대한 대가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그것과 반동 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하여 소멸하려 든다. 그것은 아주 지능적이고 사악하고 완벽에 가까운 자기숭배이다.

이제 주님이 등장할 차례이시다. 1등과 2등이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주님을 1등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주님, 주님은 항상 저에게 전부이십니다!”라고 주저하지 않고 찬양하며 손을 높이 든다.

우리는 아주 강한 금속을 두껍게 제련하고 광을 내서 만들어낸 견고하고 위풍 있는 옷을 지어 입는다. 그것은 종교적인 것이며 교리적인 것으로서 잘 만들어진 ‘자기방어기재’이다. 

남들에게 공히 인정받는 훌륭한 평신도와 사역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의 광채가 우리의 몸을 비추시게 되면 그 견고 해 보이는 철갑을 모두 녹여 버려서 알몸이 되어 나오게 하신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차마 몰랐다고 말씀 드릴수가 없습니다.”라고 주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끝없이 통곡할 것인지, 아니면 매일 밤 잠자리에서 “잘 알지만,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통곡할지를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처벌을 받게 될지는 사실 그다음 일이다. 어떻게 나를 몇 조각으로 쪼개는 듯한 이 잔인한 고발을 보게 되었단 말인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이런 것이란 말인가? 나는 한동안 지하철을 나와서 아무 데나 걸터앉아 있었다.

눈물을 겨우 삼키고 몸을 추수르고 어두운 골목을 걷기 시작했을 때 주님의 목소리가 이렇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너의 그 위험하고 달콤한 고백을 듣고 싶다. 내가 너를 아노니....두려워 말고 도전하라. 내가 전부라고 고백하라!”

 

31 마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를 보러 오듯이 너에게 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이다.

[에스겔(표준새번역)33:31]

2.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표준새번역)10:2-3]


- 여호수아 IT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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